사진/지난 3월5일 과천정부청사 앞에서 열린 한·칠레자유무역협정 저지를 위한 전국농민대표자대회.(전국농민회 총연맹)

상대를 잘못 골랐다. 3월 초 타결이 임박하는가 싶더니 결국 틀어져버리고 만 한·칠레자유무역협정(FTA)은 우리 정부의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게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농업강국’ 칠레를 자유무역협정의 파트너로 여긴 애초 의도부터 오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더 심각한 건 우리 정부가 아직 오판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 약속’은 무조건 강행?

애초 양국이 이달 말까지 타결짓기로 합의한 한·칠레자유무역협정은 지난 5일 5차 막판협상을 앞두고 칠레가 종전보다 후퇴한 관세양허안을 제출하면서 타결전망이 불투명해졌다. 외교통상부 김해용 다자통상과장은 “현재 칠레의 최종협상안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므로 아직 타결은 예단할 수 없다”며 “저쪽 안을 보고 합당하면 체결하는 것이고 미흡하면 다시 얘기해볼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전히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셈이다.

정부의 오판 여부를 따지기 전에, 한·칠레자유무역협정이란 무엇인지부터 보자. 자유무역협정은 협정을 맺은 당사국간에 품목별로 수입관세를 완전히 철폐하거나 내려 무역자유화를 꾀하는 양국간 또는 지역간 특혜무역협정이다. 세계무역질서는 세계무역기구(WTO)라는 다자간 틀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WTO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물결에 대한 국제 비정부기구(NGO)의 저항 및 각국의 이해관계 대립으로 뉴라운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자 우선 국가 또는 지역블록 수준에서 무역자유화로 나아가자며 자유무역협정을 예외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한·칠레자유무역협정은 지난 98년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기구(APEC) 정상회의에서 양국 정상의 합의로 추진됐다. 양국은 그동안 4차례에 걸쳐 협상을 진행했지만 서로 내놓은 농산물 및 공산품 관세양허안에 대해 이견을 좁히지 못해 결국 애초 잡혀 있던 협상타결 시점(2000년 말)을 넘겼고, 우리 정부는 지난 2월 최종 관세양허안(표 참조)을 제출했다. 한·칠레협정을 둘러싼 양국의 관심품목은 한국은 공산품, 칠레는 농산물이다. 세계적인 농산물수출국(케언즈그룹)인 칠레는 우리쪽에 포도, 자두, 사과, 배 등 과일을 수출하고 우리는 칠레에 자동차, 냉장고 등 공산품을 수출하는 게 관심인 것이다.

오판 부분은 묻힌 채 협정체결이 강행되고 있는 사정에는 ‘대통령의 약속’이란 점이 깔려 있다. 농협중앙회 조사부 박기용 과장은 “정부는 양국 정상이 약속한 것이므로 당연히 추진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해왔다”며 “치밀한 실익분석 없이 오직 협정체결만을 위해 무작정 달려온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 점은 그동안 협상과정에서 한국이 농산물에 대해 양보를 거듭해온 데서도 확인된다. 정부는 4차협상에서 그 전까지 ‘WTO 뉴라운드 이후’로 미뤘던 506개 농산물 중 칠레 관심품목(칠레가 자신들의 경쟁력을 배경으로 개방을 요구하는 품목) 369개에 대해 즉시 관세철폐, 5∼10년 내 관세 철폐 등의 양보안을 내놓았다. 당초 문을 열어주지 않기로 했던 포도, 키위, 복숭아, 자두 등도 계절관세 도입으로 한발 물러섰다. 지난 2월 최종수정안에서도 쇠고기를 관세할당(일정물량까지 관세를 낮춰주는 것)으로 바꾸는 등 사과와 배만 빼고 칠레쪽 관심품목은 거의 개방하는 쪽으로 양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칠레가 우리쪽 관심품목인 공산품 관세철폐안을 오히려 후퇴시키면서 결렬국면을 맞고 있는 것이다.

칠레 느긋, 한국 궁지

사진/한·칠레자유무역협정은 지난 98년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기구(APEC)정상회의에서 양국 정상의 합의로 추진됐다.(강재훈 기자)

그렇다면, 왜 하필 칠레를 협정 파트너로 삼았는가. 우리 정부는 칠레를 택한 명분으로 △계절이 반대이므로 국내 과일농가에 큰 피해가 없다 △칠레를 거점으로 중남미 공산품수출시장에 진출할 수 있다 △우리도 자유무역협정 대열에 동참해 개방의지를 천명해야 한다 △자유무역협정 체결 경험이 풍부한 칠레로부터 협상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등의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과연 한·칠레자유무역협정은 우리에게 실익이 있는가. 세계 6대 메이저 다국적 곡물기업이 진출해 있는 칠레는 포도(세계 수출시장점유율 1위), 자두(세계 2위), 키위 사과 배(세계 3위) 등 과일 수출강국이다. 농협중앙회는 무관세로 값싼 칠레산 농축산물이 들어올 경우 국내생산농가 피해는 연간 시설재배포도 300억원, 사과 940억원, 배 1159억원, 복숭아 등 기타 과일 5300억원, 쇠고기와 돼지고기 각각 6천억원 등 약 2조원의 직접피해가 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특히 칠레산 값싼 수입과일이 우리 농산물의 가격상한을 정해 버리기때문에 칠레산 포도가 3%만 들어와도 국내 포도생산농가는 30% 이상 피해를 입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어명근 박사는 “값싼 칠레 과일로 소비자 1가구당 1만원 이익이 날 수 있지만 이럴 경우 과일생산농가는 1500여만원 이상 손해를 입게 된다”며 “칠레 포도가 들어오면 배까지도 한꺼번에 영향을 받아 폭락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체관계에 있는 다른 과일 생산농가에게도 불길이 번지게 된다는 얘기다. 지난해 미국산 오렌지수입이 국내 과채류 전반에 걸쳐 대폭락을 가져온 사례가 대표적이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은 “우리 정부가 칠레의 압력에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면서 국익손실을 가져올 협상안을 제시하는 등 칠레에 우롱당하는 한심한 협정을 강행하고 있다”고 분노하고 있다.

한·칠레자유무역협정은 WTO가 강요하는 것도 아니며 우리 정부가 칠레와 협정을 맺지 않는다고 해서 국제사회에서 공식적인 제재를 받는 것도 아니다. 외교부 김해용 다자통상과장은 “세계적인 무역개방 흐름에 우리도 발맞추자는 뜻에서 한·칠레협정이 추진되고 있는 것”이라며 “우리의 국내총생산에서 대외무역의존도가 65%나 되는 만큼 국제적 대세에 뒤처지면 곤란하다”고 말했다. 우리도 무역개방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보여주는 신호탄으로 한·칠레협정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협상에서 칠레는 느긋한 입장이다. 이미 멕시코 등 10여개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어 무역개방을 과시해온 칠레는 “우리로서는 협상이 무산돼도 그만이지만, 협정을 먼저 제안한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큰 상처를 입게 될 것”이라며 몰아붙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쪽은 제대로 맞대응하지 못한 채 “협상 무산위기는 칠레 탓”이라는 궁색한 말만 하고 있다. 이 정도면 먹혀들겠지, 하는 생각으로 협정을 제안했는데 이제 와서 “농산물 때문에 못한다”고 거부하기도 어려운 궁지에 몰린 것이다. 실제로 농림부 유병린 통상협력과장은 “우리 정부가 칠레에 끌려가는 구도로 가고 있는 형국”이라고 말했다. 칠레를 상대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하는 모양새가 돼버린 셈이다.

공산품 수출에 이익은 있는가

국내 농산물 피해를 감수한다치더라도 대칠레 공산품 수출은 그만큼 이익을 낼 수 있는가. 칠레시장에서 우리 공산품은 전자레인지 69%(1위),세탁기 65%(1위), 자동차 26%(2위), 냉장고 31%(2위) 등 ‘이미’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칠레의 인구는 한국의 3분의 1, 구매력은 5분의 1 정도에 불과해 공산품 수요시장도 협소하다. 게다가 공산품 관세가 현재 8%인 칠레는 한·칠레협정과 무관하게 2010년까지 단계적으로 무관세로 간다는 시간표를 이미 제출해놓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어명근 박사는 “시장자체가 크지도 않은데다 이미 칠레가 관세철폐안을 내놓고 있는 마당에 앞으로 몇년간 관세를 0%로 내려준다고 우리 공산품수출에 얼마나 득이 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칠레를 거점으로 중남미시장에 진출한다는 애초 구상도 까다로운 원산지 규정 때문에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농림부 당국자는 “칠레를 이용해 중남미에 진출하는 건 말뿐”이라며 “자동차의 경우 칠레산 부품을 80% 이상 써야 한다는 원산지 규정으로 우리 공산품이 중남미시장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막히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우회수출을 막기 위해 중남미국가들이 ‘칠레산’에 대해서만 무관세 혜택을 주고 있는데도 ‘뭘 모른 채’ 순진한 기대를 해왔다는 것이다.

한·칠레협정이 외자유입 효과를 낳을 것이라는 기대도 마찬가지다. 우리쪽은 협정이 체결되면 칠레에 무관세로 물건을 팔아먹기 위한 외국자본의 한국투자가 확대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전농은 “GDP가 770억달러에 불과한 칠레시장을 겨냥해 한국에 투자할 자본은 없을 것”이라며 “되레 한국에 무관세로 상품을 수출하려는 외국자본의 칠레투자가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농업부문의 피해는 접어두고 국가경제 전체적으로 봐도 실익이 없는데 협정이 추진되고 있는 양상인 것이다.

칠레와 우리의 계절이 반대여서 국내농산물에 별 영향이 없다는 정부의 애초 판단도 현실을 모르는 엉뚱한 낙관이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전농 이호중 정책부장은 “칠레 과일산업은 다국적 대기업중심이어서 현대화된 운송저장시설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연중 출하시기가 따로 없다”며 “우리나라에서도 시설재배를 통해 과일이 1년 내내 유통되고 있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일본은 농업부문 철저히 보호

사진/농협중앙회는 값싼 칠레 과일이 무관세로 들어올 경우 약 2조원의 피해가 날 것으로 보고 있다. 시장에서 과일을 고르고 있는 시민들.

한·칠레자유무역협정은 양국간 협정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국시장을 겨냥하는 농산물 수출국가들이 칠레와 동등한 관세 적용을 요구해올 것이고, 최혜국대우를 원칙으로 삼는 WTO 협상에서도 관세인하 압력에 직면할 공산이 크다. 농림부 유병린 통상협력과장은 “칠레와 맺게 될 관세감축안은 WTO 전반에 영향을 끼친다”며 “칠레와의 협정을 들먹이면서 각국이 관세인하 압력을 제기할 경우 우리가 거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워 농산물시장의 문을 열어줄 경우 다른 국가들과의 관세협상에서 스스로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얘기다.

우리처럼 농업부문 경쟁력이 취약한 일본은 어떤가. 산업자원부 서석숭 미주협력과장은 “WTO 회원국 중 한국과 일본만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고 있지 않다”며 “일본, 중국, 미국 등과 자유무역협정을 맺기 전에 한번 연습게임으로 칠레와 협정을 맺어보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은 자국 농업보호를 위해 농업부문을 제외시켜야 협정이 가능하다는 원칙 아래 농업분야 수출이 거의 없는 싱가포르와 협정체결을 준비하고 있다. 일본농업과 큰 대립관계가 없는 국가를 고른 것이다. 특히 일본과 비슷한 농업구조를 가진 우리가 칠레를 ‘최적의 협정 파트너’로 삼은 것과 달리, 일본은 자국 농업부문과 정면충돌한다는 이유로 칠레를 자유무역협정에서 ‘부적절한 국가’로 분류하고 있다. 경북대 김충실 교수(농업경제학)는 “농업분야는 예외조처를 두거나 손해가 날 것 같으면 발을 빼거나 협상을 최대한 미루는 게 국제 자유무역협정의 관행”이라며 “한·칠레협상처럼 농업과 비농업을 똑같이 취급해 교환하는 방식은 선례가 없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칠레는 뉴질랜드와 10여년간 자유무역협상을 끌어오면서 결국 자국 낙농업의 피해를 가져온다며 협정을 깨기도 했다.

이번 자유무역협정이 양국 정상의 약속이란 이유로 앞뒤 재보지 않고 추진돼왔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협정이 가져올 영향에 대한 조사분석이 거의 없다는 점이 이를 뒷바침해준다. 무역협회 민경선 국제통상팀장은 “업계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지 못해 유리한 면과 불리한 면을 말하기 곤란하다”며 “막바지에 이르렀지만 필요하다면 의견수렴을 해볼 작정”이라고 말했다. 산업자원부도 “협상이 체결된 상태도 아니므로 분석자료를 내놓을 수 없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밑지는 장사’라고 인정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에게 별 실익이 없다는 점을 당국이나 업계도 ‘뒤늦게’ 인식하고 있다. 전경련 박대식 다자협력팀장은 “이번 협정은 한국이 무역자유화로 나아간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지 기업 입장에서 주판알을 튕겨봐도 사실 별 이익은 없다”고 털어놓았다. 칠레를 통한 중남미시장 진출에 대해서도 외교부 김해용 과장은 “우리 기업의 칠레 공산품시장 점유율이 높긴 하지만 여기에 안주하면 나중에 시장을 잃을 수도 있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애초에 내세웠던 중남미시장 진출 이익은 오간 데 없고, 현상유지를 위해서라도 협정이 필요하다는 논리다.

이처럼 실익에 대한 의문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쪽 협상당사자들은 이제 발을 빼면 국제사회에서 망신만 당한다거나 세계적 추세가 자유무역협정이라는 이유를 들며 협정체결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전농 이호중 정책부장은 “농업을 희생시켜 우리가 옷을 다 벗었는데도 칠레가 더 많은 양보를 끌어내려 막판 타결지점에서 틀어버리자 우리만 당황하고 있는 꼴”이라며 “칠레의 노련한 협상능력에 대책없이 당하고 있다”고 분노했다. 물론 실리를 바탕으로 협상을 하다 서로 맞지 않으면 그만두는 게 정상적인 협상과정이다. 그만두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건 설득력이 없다.

언제까지 협정타결에 매달리나

아직 협상안이 타결된 건 아니지만, 한·칠레자유무역협정은 ‘한수 배우는’ 좋은 경험은커녕 국내 과일농가 파탄이라는 호된 대가를 치를 공산이 크다. 물론 칠레가 노리는 게 대폭적인 농산물 시장개방인 만큼 절충과 타협의 여지가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서로 결코 합의할 수 없다’는 사실만 합의한 채 물건너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농림부는 “칠레가 이달 말까지 개선된 공산품 관세양허안을 내놓기로 한 만큼 공은 칠레에 넘어간 상태”라고 말했다. 하지만 협상과정에서 공은 늘 우리에게 넘어와 있었다는 게 더 정확하다. ‘미워도 다시 한번’식으로 협정타결에 매달리면서 끝내 농산물시장의 빗장을 열어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뼈아프게 확인할 것인가. 선택은 코앞에 다가와 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