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니뭐니 해도 배고픈 것처럼 서러운 일은 없다. 배고픈 정도가 아니라 굶어죽는 경우라면 비참함의 극치이다. 세계적으로 굶주림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인구가 8억 1,500만명에 달하고 매년 3,600만명, 한시간에 4,000명이 넘는 사람이 굶어죽어간다. 9·11테러로 희생당한 사람의 20배가 넘는 사람들이 매일 기아의 고통 속에 목숨을 잃는다.

반면 미국인들은 동물성 지방과 단백질의 과다섭취로 매년 수백만명이 심장혈과 질환으로 사망한다. 미 심장협회는 이들이 지불하는 치료비용만도 연간 1,000억 달러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미국인들은 불어난 체중을 줄이기 위해 매년 50억 달러를 지출한다(뉴욕 과학아카데미 연보). 기아와 포식이 공존하는 이 세계는 분명 정상이 아니다.

미국 등 농산물 수출국은 식량의 교역자유화가 빈곤가 기아문제 해법이라고 주장한다. '세계 전체의 식량공급은 충분하다. 다만 국가간 이동이 자유롭지 못해 식량부족이 발생한다"며 대다수 개도국의 식량안보 논리를 부정한다.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에서 힘겹게 인정됐던 식량안보의 필요성은 세계무역기구(WTO) 농업협상에서는 '협상의 고려사항'정도로 퇴색했다. 지난 해 세계무역기구 도하 각료회의에서 식량수출국들은 '식량안보 박스를 신설,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특정 농산물에 대해 예외를 인정하자'는 남미와 아프리카 빈국들의 제안을 거부했다.

얼마 전 유엔 인권위원회에 식량권 보호의 필요성을 건의하는 보고서가 제출됐다고 한다. 3월 18일부터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58차 유엔 인권위에 장 지글러 식량권담당 유엔특별보고관이 제출한 보고서는 "세계무역기구의 뉴라운드 협상에서 일부 개도국들이 제안하고 있는 색량안보가 각별히 고려돼야 한다"며 "식량권 보호는 인권 차원에서 지적재산권 보호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건의했다고 외신은 전하고 있다. 그는 "만약 식량권이 세계무역기구에 의해 다뤄지지 않는다면 세계무역기구를 국제인권법의 적용대상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 보고서가 주는 의미는 식량문제를 인권차원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보고서는 전세계 인구가 충분히 먹고도 남을 식량이 생산되는 세상에서 기아로 인한 죽음이 방치되고 있는 현상을 '침묵의 대학살'로 표현하고 있다. 다국적 곡물메이저와 수출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식량의 교역자유화에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식량문제를 인권적 차원으로 접근을 하면 식량안보나 식량주권에 대한 해석도 폭이 넓어진다. 인권은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천부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각국의 식량확보 노력은 신성불가침의 권리로 논쟁의 대상에서 벗어난다. 농업생산 보호를 위한 보조금은 감축대상이 아니라 장려해야 할 정책이 되고 국가와 국민의 안위에 직결되는 주곡을 포함한 주요 품목에 대한 국경보호 역시 정당화될 수 있다. 생명공학과 같은 첨단기술은 몇몇 기업의 독점적 부를 보장하기에 앞서 인류가 공유해야할 기술로 인식돼야 하는 것이다.

경쟁력이 없으면 농업생산을 포기하고 달러가 없으면 굶어죽으라는 식량수출국들의 교역자유화와 시장논리에 맞서 식량은 인권이라고 주장한 장 지글러 유엔특별보고관의 보고서는 신선한 충격임에 틀림없다.

- 오 덕 화 편집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