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경해 열사의 숭고한 희생을 통해 촉발된 전세계 농민들과 반세계화 운동가들의 투쟁이 마침내 결실을 거두었다. 우리시각 15일 오전, WTO 제5차 각료회의는 정부조달 및 투명성 제고 등에 관련된 이른바 ‘싱가포르 이슈’에 대한 합의 도출에 실패함으로써 각료선언문 채택이 무산된 채 결렬되었다. 하지만 WTO는 오는 12월 15일, 특별 각료회의를 개최하여 다시 한 번 농업 및 비농업부문 등의 협상 세부원칙(모델리티) 수립에 나설 예정이어서 이에 대한 철저한 대비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한농연 12만 회원들은 이번 WTO 제5차 각료회의의 전 과정을 지켜보면서 정부 협상대표단이 보여준 협상의지 및 협상력 부재를 심각하게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故 이경해 열사의 몸을 던진 투쟁의 성과를 우리 농업 및 식량주권 사수를 위한 협상력 제고에 제대로 활용조차 못했다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제 발표된 각료선언문 초안이, 농업개도국마저 일부 특별품목(SP)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농산물의 급격한 관세인하를 규정하였으며 의무수입쿼터물량(TRQ) 및 관세상한 설정ㆍ추곡수매가 결정과 관련된 품목별 감축대상 보조금 상한 설정 등 한국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내용으로 이뤄져 있었기에 더욱 그러하다.

지난 8월 중순 이후 미국-EU 간의 DDA 농업협상 절충안이 마련되고 농산물 수출개도국 22개국 그룹이 형성되는 등 급격히 변화했던 협상 지형에 대해 한국은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한 측면이 있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정부는 이해관계를 함께하는 10개국과 세력을 형성하려 했으나, 각료선언문 초안 발표 직후 스위스가 탈퇴 의사를 밝히는 등 우여곡절을 겪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UR 협상 이후 IMF 환란을 거쳐 온 우리 농업ㆍ농촌ㆍ농민의 현실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지경까지 몰리고 있다. 비록 칸쿤 각료선언문 채택이 무산된 채 제5차 각료회의가 마무리되었으나, 우리나라의 추가적인 농업개방을 요구하는 농산물수출국들의 압력은 더욱 거세질 것이 분명하다.

이번 칸쿤 각료회의의 과정 및 결과를 우리 정부는 철저히 분석하고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오는 12월 15일 예정된 특별각료회의는 한국 등 농산물순수입국에 더욱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될 우려가 높다. 이를 대비한 협상 논리 및 근거의 개발ㆍ국제공조체제의 강화ㆍ국내농업 보호를 위한 대책 마련 등 정부의 실질적인 농업보호 정책은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함을 한농연은 분명히 지적코자 한다.

“내 몸은 먼저 가지만, 정신만은 지켜볼 것이다”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긴 故 이경해 열사의 농업사수 의지가 헛되지 않도록, 정부는 배수의 진을 치겠다는 각오로 향후 협상에 임해야 하며 획기적인 국내농업 대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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