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관세화 유예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정부는 쌀 시장개방 폭 확대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2004년산 추곡수매가를 전년 대비 4% 인하하기로 정부안을 결정해 농민들의 비난이 빗발치고 있다. 특히 정부는 이렇게 쌀수매가를 인하하고, 현행 수매제도를 폐지해 공공비축제로 전환한다는 방침이면서도 정작 쌀 농가 소득안정방안에 대해서는 향후 논의하겠다는 입장이어서 논란이 되고 있다.

농림부는 약정매입가를 4% 인하한 이유에 대해 쌀 협상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고,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 등에 따른 시장개방폭 확대로부터 농가에 미치는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국내외 가격차를 줄여나가자는 취지라고 설명한다.
쌀 협상과 DDA 협상결과에 따라 시장개방 폭의 확대는 불가피하며, 쌀 협상 입지 강화와 쌀산업 장기 안정을 위해 현재 4배 수준인 국내외 가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것. 또 쌀의 공급과잉 기조가 계속되기 때문에 추곡가와 시장가와의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는 것. 따라서 정부는 쌀산업에 미치는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추곡가는 인하하되, 쌀협상과 추곡가의 인하에 따른 영향을 포함한 종합적인 쌀농가 소득안정방안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정부의 추곡수매가 인하 방침은 수매제 폐지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의 일환이며, 시장개방을 염두에 두고 쌀가격을 의도적으로 하락시키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50년이 넘는 정부의 양곡 수급통제정책으로 극도로 취약해진 민간 양곡 유통시장의 여건을 감안하지 않고 정부가 추곡가 인하와 수매제 폐지를 시도하는 것은 우리의 주권이자 안보산업인 쌀을 시장에 내맡기려는 의도인 것이다.

쌀의 특성상 추곡수매가 폐지되면 수확기에 홍수출하가 이뤄져 시장의 혼란과 농가소득 감소는 불보듯 뻔하다. 정부와 국회가 결정하는 추곡수매가와 수매물량은 수확기 산지쌀값 결정을 위한 ‘참조가격’ 내지 ‘기준가격’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수매가 인하발표 직후 12일 공개한 ‘쌀산업종합대책’은 양곡관리법 개정을 통해 수매제를 폐지하고 내년부터 공공비축제를 도입하는 것으로 돼 있다. 비축목표는 600만석 내외로 하고, 산지가격으로 매입해 회전관리를 위해 매년 일정물량을 방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농림부가 추진하고 있는 공공비축제는 지역별 산지가격으로 결정되는 가격과, 지역별 인구와 벼 재배면적을 기초로 하는 매입량으로 인해 지역별 농가소득의 불균형을 빚음을 물론이고, 쌀 시장의 기준가격 부재로 인하여 가격하락을 부추길게 뻔하단 지적이다. 특히 비축목표를 겨우 600만석으로 하고, 그마저도 회전비축을 하면 사실상 수확기에 정부가 공공비축으로 매입할 물량은 많아야 연간 생산량의 10%도 안되는 300만석에 불과해 가격하락을 막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연간 3000만~3600만석의 생산 물량을 무엇으로 소화할 것인지 의문시 되는 부분이다. 더구나 농협의 미곡종합처리장(RPC)도 구조조정 국면이어서 민간에서 나머지 물량을 제값에 소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과연 공급과잉인가= 최근 언론은 우리 쌀재고가 계속 늘어 공급과잉이 심각하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농림부도 90년대 이후 연속 풍작과 의무수입(MMA, 최소시장 접근) 물량 증가로 공급은 늘어나는데 반해 소비감소로 인해 매년 평년작만 생산돼도 공급과잉이 심해질 것으로 본다. 실제 의무수입 쌀의 지난해 10월말 현재 국내 재고 물량이 274만9,000석으로 전체 재고미(763만2,000석)의 36%에 달한다.

그러나 앞으로 추가로 수입을 개방하지 않는 한 재고 문제가 그렇게 큰 문제인지는 의문이다. 실제 재고량을 보면 2000년 679만석이던 쌀 재고는 2001년 927만석, 2002년 1005만석으로 증가했으나 이후 대북지원, 태풍 피해 등에 의한 흉작으로 2003년엔 763만석으로, 올해는 678만석으로 떨어질 전망이다. 이는 FAO 권장재고량인 600만석(연간 소비량의 17~18%)과 엇비슷한 수준이다. 게다가 올해도 예년처럼 북한에 40만톤 (300만석 정도) 가량을 지원하게 된다면 재고 과잉 논리는 쏙 들어갈 문제다.

그동안 양정문제에서 농민들이 정부를 불신해온 가장 큰이유는 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 규정 등을 내세워 가격지지는 폐지하려 들면서 소득보장은 차일피일 미루는 점이다. 이번에도 이런 모양새가 거듭되고 있다. 수매가 인하, 수매제 폐지는 분명한데 소득보장 정책은 결정된게 없다. 농림부가 밝힌 것은 쌀 생산농가의 소득안정을 위해 논농업직불제, 쌀소득보전직불제, 친환경농업직불제 개편안을 마련, 농특위 등에서 논의한다는 정도다. 지난 2년간 수매가를 동결하고 올해는 4%를 내리겠다면서 이를 어떻게 개편하고 단가를 얼마나 올릴지에 대한 설명은 인색하다.

한농연은 추곡가 4% 인하방침을 즉각 철회할 것과 함께 논농업직불제 등 WTO의 허용대상 소득지지정책을 선진국 수준으로 획기적으로 개선하라고 요구했다.
전국농민연대는 13일 성명을 내어 “국무회의에서 재검토가 요구된 추곡수매가 인하안을 일주일만에 재상정, 대책없이 추진하려는 농림부를 이해할 수 없다”며 “수매가 인하를 고려하기 전에 소득보전대책부터 내 놓는 것이 순서”라고 밝혔다.
특히 기존의 추곡수매제를 도하개발아젠다(DDA) 농업협상이 종료되는 시점까지 유지하면서 직불제 강화와 농협 등 민간유통 활성화를 위한 안전판을 확보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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